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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주는 의미

활자사랑 2024. 3. 22. 21:00

 

죽음이 주는 의미

 

삶의 가장 훌륭한 스승이 죽음이라는 사실은

실로 우주적인 역설이다.

어떤 사람이나 상황도 죽음만큼 많은 것을 가르쳐 주지 못한다.

어떤 사람이 당신이 집착하고 있는 것들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지를

깨우쳐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죽음은 그 모든 것을 순식간에 앗아가 버린다.

어떤 사람이 모든 인간은 인종과 빈부를 초월하여

동등하며 차별이 없음을 가르쳐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죽음은 단번에 만인을 동등한 위치에 가져다 놓는다.

문제는, 죽음을 스승으로 모시게 될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릴 작정이냐는 것이다.

죽음의 가능성, 단지 그것조차도 어느 순간에든

우리를 깨우쳐 줄 힘을 지니고 있는데 말이다.

현명한 사람은 내쉰 숨을 다시 들이킬 수 없는 순간이

언제든지 닥칠 수 있음을 안다.

그것은 언제 어디서라도 일어날 수 있고,

그러면 당신의 마지막 숨은 넘어가 버린다.

우리는 이로부터 뭔가를 깨달아야만 한다.

현명한 사람은 죽음이라는 엄연한 현실이 피할 수 없고

예측할 수 없는 것임을 전적으로, 완전히 받아들인다.

어떤 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면 언제든지 죽음을 생각해 보라.

당신이 질투심 많은 성격이라고 하자.

당신은 당신의 짝이 다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 것을 견디지 못한다.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해 주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사는 것이,

그것이 정말 그렇게 로맨틱한 사랑인 걸까?

자신의 이기적인 관심사를 잠시만 접어둘 수 있다면,

당신은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충만하고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기를 바란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가장 높은 삶을 살도록 당신을 자극하려면 죽음이 동원되어야만 한다.

왜 모든 것을 빼앗길 때에 이르러서야

내면 깊이 들어가서 가장 높은 잠재력에 이르기를 배우겠다는 것인가?

현명한 사람은 이렇게 생각한다.

한 호흡 간에 이 모두가 바뀌어 버릴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살아 있는 동안에 가장 높은 삶을 살겠다.

나는 더 이상 내 사랑하는 사람들을 괴롭히지 않겠다.

존재의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삶을 살아가겠다.’

이것이 의미 깊은 인간관계를 위해서 필요한 태도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무심할 수 있는지를 보라.

우리는 그들이 당연히 늘 우리 곁에 있어 주리라고 생각한다.

그들이 죽어 버리면 어쩔 것인가? 또 당신이 죽는다면 어쩔 텐가?

그들을 보는 것도 오늘 저녁이 마지막이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떻겠는가?

그러면 그날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으로 마지막이 될 것이다.

어떤 기분이겠는가? 그들과 어떤 이야기를 주고받겠는가?

평소 그들에게 품고 있던 자잘한 시기나 불평 따위에는 신경이나 쓰이겠는가?

그것이 그들과 함께 보낼 마지막 시간임을 안다면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많은 사랑을 줄 수 있겠는가?

당신의 삶은 정말 달라 보일 것이다.

이것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죽음은 음침한 것이 아니다.

죽음이야말로 삶을 통틀어 가장 위대한 스승이다.

죽음이 당신을 노려보고 있다면 어떨지, 기꺼이 자신을 들여다봐야만 한다.

그러든 말든 아무런 차이도 없을 만큼 마음이 평화로울 수 있어야 한다.

삶의 매 순간을 머리 위에다

거미줄에 칼을 매달아 놓은 것처럼 느끼며 살았다는

한 위대한 요기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죽음을 그처럼 가깝게 의식하며 산 것이다.

이처럼 죽음은 우리의 지척에 있다.

자동차를 탈 때마다, 횡단보도를 건널 때마다, 뭔가를 먹을 때마다,

그것이 당신의 마지막 행위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든지,

바로 그것을 하다가 죽은 사람이 틀림없이 있다.

죽음에 대해 논하기를 겁낼 필요가 없다.

죽음 앞에서 긴장하지 마라.

오히려 죽음에 대해 아는 것이 당신으로 하여금

삶의 매 순간을 충만하게 살도록 돕게 하라.

순간순간이 소중하다.

살날이 한 주일밖에 남지 않았음을 아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 이것이다.

그들은 삶에서 가장 소중했던 주일은

그 마지막 주일이었다고 말할 것이 틀림없다.

그 마지막 주일에는, 모든 것이 수백만 배나 더 의미 깊을 것이다.

매 주일을 이렇게 살아간다면 어떨까?

 

항상 죽음을 대면하고 있는 것처럼 살기를 배우라.

그러면 당신은 더 대담해지고 가슴이 더 열릴 것이다.

삶을 온전하게 살면 마지막 소원 같은 것은 품고 있지 않을 것이다.

매 순간을 충실히 살았으므로.

그래야만 당신은 삶을 온전히 경험한 것이고,

살기를 겁내는 당신의 부분을 놓아 보낸 것이다.

삶에서 얻어야 할 유일한 것은

삶을 경험함으로써 오는 성장임을 당신이 이해했을 때,

두려움은 사라질 것이다.

삶 그 자체가 당신의 경력이며,

삶과의 사귐이야말로 가장 의미 깊은 관계이다.

그 밖의 모든 일은 당신이 약간의 의미로써 삶을 장식해 보고자

주의를 쏟고 있는, 삶의 작은 파편들이다.

삶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해 주는 것은, 삶을 기꺼이 살고자 하는 태도이다.

그것은 어떤 특별한 사건이 아니라

삶의 사건들을 기꺼이 경험하고자 하는 태도이다.

 

삶의 경험으로 당신을 완전히 채워라.

삶이 당신 존재의 밑바닥을 건드리게 하라.

그것이 불가능한 순간은 없다.

심지어 당신에게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그저 삶의 또 다른 경험으로서 바라보라.

죽음이 모든 것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놓는다는 사실은

깊은 평화를 가져다준다.

모든 것이 그저 시공간 속을 지나쳐 간다

현명한 사람은 삶이란 결국 죽음에 속한 것임을 안다.

죽음은 때가 차면 당신에게서 삶을 돌려받으러 오는 자다.

죽음은 주인이고 당신은 세입자일 뿐이다.

사람들은 이렇게들 말한다.

그는 빌린 시간을 살고 있어,’ 혹은 그는 삶을 조금 더 연장했어.’

시간을 어디서 빌리고 누구에게서 연장했다는 말인가?

물론 죽음에게서다. 소유권자는 죽음이다.

그것은 언제나 죽음의 것이었다.

우리는 죽음과 좋은 관계를 맺어 놔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두려워하는 관계여서는 안 된다.

하루를, 또 하나의 경험을 허락한 것에 대해,

그리고 삶이 소중해지도록 희귀성을 창조해 준 것에 대해 죽음에게 감사하라.

이렇게 하면 삶은 마음대로 낭비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깊이 음미해야 할 것이 된다

당신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지,

일어나기를 바라는 삶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일이 일어나게 하려고 애쓰느라고 삶의 한 순간도 허비하지 말라.

당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감사하고 음미하라.

시시각각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모르겠는가?

이것이 삶을 사는 방법이다.

죽음의 낭떠러지 끝에 서 있는 것처럼 살라.

왜냐하면 실제로 그러하니까.

 

* 출처: 상처받지 않는 영혼 (마이클 싱어)

 

https://youtu.be/9Gpc4btQaW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