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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수업 - 법상 - 본문
부자수업
모든 일은 꼭 필요한 ’일’이 꼭 필요한 ’때’에 꼭 필요한 ’만큼’ 일어난다
저자 법상 출판 마음의숲
안녕하세요
좋은 책과 글을 통해 1% 더 성장하는 시간입니다.
오늘은 법상스님의 '부자수업'을 살펴보려 합니다.
스님이 알려주는 부자되는 방법이라니 참 흥미롭습니다.
스님은 단순히 돈을 버는 방법이 아니라
돈을 불러오는 사람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자연스럽게 부를 끌어당기기 위해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지,
스님이 풀어내는 부자수업, 함께 보시죠.
‘부자’를 원했는데 ‘가난’이 오는 이유
보통 사람들은 자식에게 좋은 성적 좀 받아오라고 다그친다.
이것은 내가 자식을 향해서 나쁜 성적에 대한 에너지를 내뿜는 것이다.
그러면 당연히 나쁜 성적에 대한 에너지가 더 들어온다.
나쁜 성적 받아 온 자식을 보면서 ‘좋은 성적’을 받아오라고 주문하고 있지만
좋은 성적에 집착할수록 부모님의 마음은 사실 ‘나쁜 성적’에 더욱 머물게 된다.
나쁜 성적을 두려워하는 마음이 오히려 나쁜 성적을 끌어당긴다.
유유상종(類類相從)의 법칙대로, 나에게 있는 것,
즉 두려움을 우주는 계속 더 체험하도록 끌어들인다.
자기 안에 쌓인 것, 즉 업(業)이 그대로 업보라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나쁜 성적으로 인해 마음이 상하고 기분이 나쁘다는 것 자체가
바로 나쁜 성적에 마음을 모았다는 방증이다.
만약 좋은 성적에 마음을 모았다면 기분이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기에 자식에게 좋은 성적을 주문하면 할수록,
나쁜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받으면 받을수록
사실은 마음속에서 나쁜 성적을 내보내는 것이다.
나쁜 성적을 내보내니 당연히 내보낸 것이 끌어당겨지는 이치에 따라
다시 나쁜 성적을 받아오는 것이다.
실제로 부모가 좋은 성적에 집착해 공부하라고 닦달할수록
자식은 공부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부모님에 대한 반발심 때문에
공부를 더욱 안 하는 경우가 많다.
부모님의 그 마음이 자식의 마음으로 가 단번에 작용하는 것이다.
부모님이 자식 때문에 괴로운 마음을 내보내니,
자식은 나쁜 성적 받는 것으로 고스란히 되돌려 주는 것이다.
많은 사람이 부자가 되고 싶어 한다.
하지만 마음은 자신이 가난하다는 생각에 집중되어 있다.
그러니 부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나는 가난하다’라는 에너지를 내보내니 우주가 가난을 보내주는 것이다.
똑같은 연봉을 받아도 누군가는 행복하고 누군가는 괴로울 수 있다.
같은 현실이지만 만족하고 나누면서 행복해하는 사람에게는
우주 법계가 더 많은 풍요로움을 가져다준다.
반면 내 연봉은 적다, 나는 가난하다는 에너지를 내뿜는 사람에게는
그만큼밖에 보내줄 수 없다.
모두 한 생각이다.
부자가 되는 것, 가난하게 되는 것은 사실 한 생각에서 비롯된다.
마음이, 생각이, 내면이 가난하니 가난한 현실이 나타나는 것이다.
마음이 풍요롭고, 내면이 부유하면 현실 세계에도 머지않아
풍요와 부유함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바로 그 한 생각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 바로 마음공부의 초급 과정이다.
마음공부를 잘하면 부자도 될 수 있고, 풍요도 얻을 수 있다.
물론 마음공부를 정말 잘한다면, 애써 부자를 원하지도 않을 것이다.
외부적인 경제적 상황과는 상관없이 마음이 온통 풍요로워 언제 어디서나 만족할 것이다. 그러면 애써 원할 것도 없이 존재 자체로 이미 부자다!
더 깊은 차원으로 들어가면
인위적으로 애써 부자가 되고 성공을 통해 부와 명예를 얻게 되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깨닫게 된다.
억지로 만들지 않더라도, 내보내고 끌어당기고 하지 않더라도
그저 지금 있는 그대로 여여하고 평화롭고 그저 충분한 것이다.
원금의 수백 수천 배를 받는다
풍요로움을 느끼고 싶지만 풍요로운 마음을 내보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마음속에 나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베풀고 보시할수록 내 것이 자꾸 줄어드는 기분이 든다.
나의 돈과 마음은 한정되어 있으니 말이다.
정말 그럴까? 현금 통장 잔고는 정해져 있지만,
신기하게도 베풂의 잔고는 전혀 다르다.
베풂과 나눔을 이웃에 우주 법계에 저축하면 그 이자가 무한대로 늘어나
원금을 훨씬 뛰어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어떻게 베푸느냐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다.
그 사람의 의식 자체가 베푸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으면,
우주 법계는 무한정 가져다준다.
인색하게 굴 때와 베풀 때, 전혀 다른 세상이 펼쳐진다.
불교의 핵심은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사실에 있다.
여러분의 삶은 지금 이 자체로서 완성되어 있다.
지금 이대로 완벽하다.
완벽하지 못하다는 내 생각과 판단만 있을 뿐이지,
완벽하지 못한 존재는 없다.
완전하지 못한 삶은 없다.
여러분의 인생은 완전하고 완벽하다. 완전히 풍요로운 것이다.
그런데 스스로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부족한 것이다.
부족하다고 생각하면 내보낼 수가 없다.
이미 완성되어 있고 완전히 풍요롭다고 생각하면 어떤가?
내가 무한정 넘칠 수 있으니 끊임없이 베풀고 나눈다.
따뜻한 말도, 사랑도, 물질도, 부처님 가르침도, 진리도 다 내보내 준다.
스스로 만족하고, 내보내려면 내가 풍요롭다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한다.
자신이 얼마나 큰 존재인지 알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여러분은 지금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깊은 존재다.
완벽하고 완전한 존재다. 풍요로운 존재다.
이를 깨닫게 되면 완전히 내보내는 작용이 저절로 이루어지게 된다.
동시에 내보내는 것이 곧 들어오는 것과 직결돼 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닫게 된다.
부족하다는 생각, 못났다는 생각
보통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다.
그래서 스님들이 수행하고 또 신도님들도 절에 나와 기도하면서
깨닫기 위해 노력한다’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불교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우리는 이미 깨달았다’라는 사실이다.
깨닫지 못한 중생이라는 어떤 실체와 존재가 수행이라는 것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 아니다.
부처님께서는 ‘우리는 수행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러야 하는 존재’라고 하기보다,
‘본래 부처’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우리는 깨달음과는 너무나 먼 존재라는 큰 착각을 한다.
성철, 원효스님과 같은 고승이나 깨달은 선각자들과 비교하면
너무 못났고, 부끄럽고,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많은 사람이 자신에 대해 실망감과 좌절감을 품고 살아간다.
‘나는 부족하다, 나는 지혜롭지 못하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라는 생각을 토대로 삼아 인생을 살아간다면 어떻게 될까.
세상은 생존 경쟁의 장이고, 온통 두려운 곳일 뿐이며,
그 속의 나는 약하고, 지혜롭지 못하다고 생각하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난다.
내가 마음에 어떤 의식을 심느냐에 따라 현실이 벌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자꾸 마음속에 ‘나는 부족하고, 못난 중생이다’라는 생각을 심어 놓는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것이 아니다.
‘너희들은 중생이고, 너희들은 어리석다, 못났다, 죄도 많이 지었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려고 부처님이 온 것이 아니다.
‘본래 모든 중생은 사실 중생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닫게 해 주려고 오신 것이다.
부처는 자신이 깨달은 것을 아는 중생이며, 중생은 자신이 깨달았음을 모르는 부처다.
지혜 그 자체가 바로 우리다.
완전히 깨달은 지혜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완전한 사랑과 자비 그 자체로 완전하다.
왜 본래 행복, 만족, 완전, 풍요라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바깥의 조건에 달려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자기 마음에 달려 있다.
같은 연봉을 받으면서도 한 사람은 부족을 느끼고, 다른 사람은 풍요를 느낄 수 있다.
같은 조건 속에서 한 사람은 행복을, 다른 사람은 불행을 느낄 수도 있다.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된 사람이라 할지라도 여전히 마음은 가난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조건을 다 갖추어 꽉꽉 채운다고 할지라도, 거기에서 만족하지는 못할 것이다.
참된 행복, 풍요는 외적인 조건에 달린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음에 달렸다. 마음의 이치를 깨닫게 되면, 곧장 바로 이것을 깨닫는다.
지금 여기에서 본래 충족되어 있다는 사실, 지금 이대로 완전하다는 사실을.
그런 사람은 붓다와 예수처럼,
저 광야 속에서도 충분히 충만하며 구족되어 있고, 완전할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자기 생각으로 남들과 비교하고 분별함으로써,
이 완전하고 풍요롭고 아름다운 세상을 자기 생각 속의 가난으로 가두고 있다.
생각 속에서는 언제나 가난하고 불행하며 여전히 궁핍하다.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넘쳐나고, 더 벌어야 하고, 그러려면 잠시도 쉬지 말고 일해야 한다.
당신이 가난한 이유
우리가 가난할 수밖에 없는 가장 큰 문제는
‘나는 부족하다’라고 하는 결핍된 생각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 문제는 가난과 부자라는 단순한 이원론을 넘어,
능력의 있고 없음, 지혜의 있고 없음, 잘나고 못남, 중생과 부처 등의
수많은 이원론적인 차별심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부족하다’라는 생각은 곧 ‘나는 능력이 없다’, ‘나는 못났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어리석은 중생이다’라는 생각과 다르지 않다.
우리는 모두 완전성과 지혜, 무한한 자비와 사랑,
풍요로움과 그 모든 덕목을 완전하게 갖춘 존재다.
우리의 본질은 부처이지 중생이 아니다.
우리의 본질은 부족이 아니며 풍요이고, 증오가 아닌 사랑이며, 무명이 아닌 지혜이다.
완전성을 갖춘 본래불인 우리를
이렇게 어리석고 부족하고 못난 중생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그 모든 것이 의식의 장난에 불과하다.
내 마음에서 모든 것을 만들어 낸 것이다.
우리는 거대한 환영에 빠져 있다.
중생이고 못났다는 환영이다.
물론 잘나고 풍요롭고 똑똑한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그 사람들 또한 내면을 가만히 살펴보면
누구보다 조금 더 잘나고 부자고 똑똑한 것일 뿐이지
근원에서는 ‘완전하지 못하다’라는 불완전성에 기초하고 있음이 금방 드러나게 된다.
바로 그 불완전성과 결핍성이 우리의 현실을 불완전하게 또 부족하게 창조해 낸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라.
지금까지 풍족하게, 넉넉하게 살아왔는가?
삶이 마음먹은 것처럼 그렇게 넉넉하지는 못했다.
그 이유는 뭘까? 그건 내 마음이 넉넉하지 못한 거지,
물질이 넉넉하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바로 그 순간에도 결핍감에 시달린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사업이 확장되면 확장될수록 돈이 더 많이 부족하다.
회사도 더 키워야 하고, 돈도 더 벌어야 하고,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
아무리 수조 원을 벌어들이는 회사일지라도 그 회사는 결코 만족하지 못한다.
돈이 많은 사람일수록 가장 많이 필요한 것은 언제나 돈이다.
왜 그럴까? 돈이 많으면 풍요를 느껴야 하는데
왜 돈이 무한히 많아진 순간에도 결핍을 느낄까?
그것은 마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진정한 풍요와 부란 마음의 상태이지 물질의 상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에너지 파장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 물질이라는 것도 전부 하나의 파장이고 파동이다.
생각도 파장이고 파동이다.
모든 딱딱한 물질들도 사실 깊이 바라보면 파장이라는 에너지에 불과하다.
생각이라는 하나의 파동이 물질을 만들어낸다.
지금까지 스스로 끊임없이 살아오면서
‘나는 가난하다, 풍요롭지 못하다’라는 생각을 하니까,
바로 그 생각 에너지가 물질세계를 궁핍하게 창조해 온 것이다.
그러니 생각해 보면 제일 쉬운 것이 부자가 되는 것이다.
‘나는 풍요롭다’라는 생각으로 바꿀 수 있다면 말이다.
여러분 어떠셨나요
스님이 알려주는 부자되는 방법.
결국은 부자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 빠르게 부자가 되는 길이라고 합니다.
이미 완벽하게 가지고 있음에도 결핍된 생각 때문에 부자가 되지 못한다고 합니다.
한 마음 돌리면 바로 부자인데 아직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 권을 빨리 읽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음미하며 읽기에 좋은 책입니다.
꼭 읽어보시기를 권해드립니다.
오늘도 함께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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