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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에크하르트 톨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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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 에크하르트 톨레

성장 더하기 + 2024. 12. 20. 1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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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수피의 이야기에 따르면, 중동 지방의 어느 왕이 끊임없이 행복과 절망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었다. 

사소한 일에도 흔들리면서 심한 반응을 보였고, 행복은 일순간 낙담과 좌절감으로 바뀌었다. 

마침내 왕은 그런 자신과 삶에 몹시 지쳤고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을지 출구를 찾기 시작했다. 

그는 신하를 보내, 깨달음을 얻은 것으로 소문난 한 현자를 불러오게 했다. 현자가 오자 왕은 말했다.

 “나는 당신처럼 되고 싶소. 내 삶에 마음의 평정과 조화와 지혜를 가져다줄 무엇인가를 줄 수 있겠소? 

만약 그렇게 해 준다면 원하는 대로 보상을 해 주겠소.”

현자가 말했다.

  “어쩌면 폐하를 도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값이 매우 비싸기 때문에 폐하의 왕국 전체로도 모자랄 것입니다. 

따라서 만약 폐하가 그것을 마음에 들어 하신다면, 그냥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왕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했고, 현자는 떠났다.

몇 주 뒤, 현자는 돌아와 왕에게 옥으로 조각을 새긴 아름다운 상자를 건넸다. 

열어 보니 상자 안에는 단순한 금반지가 들어 있었고, 반지에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왕이 물었다.    “무슨 의미오?”

현자가 대답했다.

 “늘 이 반지를 끼고 계십시오.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나면, 그것이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결정 내리기 전에, 

이 반지를 만지고 그곳에 새겨진 글귀를 읽으십시오.

 그렇게 하면 언제나 평화로움 속에 있게 될 것입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이 단순한 말에 그토록 큰 힘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표면적으로 보면 이 말은 어려운 시기에는 약간의 위로가 되지만 

좋은 일이 생겼을 때는 오히려 삶의 기쁨을 반감시키는 것처럼 들린다.

 ‘너무 행복해하지 말라. 왜냐하면 오래가지 않을 테니까.’ 하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기 때문이다.

이 글귀의 깊은 의미는 앞에 나온 두 이야기의 문맥 속에서 함께 읽을 때 더욱 분명해진다. 

언제나 “그런가?” 하고 반응한 선사의 이야기는 일어나는 일들에 전혀 마음의 저항을 하지 않는, 

그 일들과 하나가 되는 자세의 위대함을 보여 준다. 

또한 항상 “아마도.”라고 단순하게 반응한 남성의 이야기는 판단하지 않는 지혜를 말해 준다. 

그리고 이 반지 이야기는 모든 것의 무상함을 알아차리면 집착하지 않고 살게 됨을 가리켜 보인다. 

저항하지 않고(무저항), 판단하지 않고(무판단), 집착하지 않는 것(무집착)

이 세 가지는 진정한 자유와 깨달음의 세 가지 측면이다.

 

반지에 새겨진 글귀는 삶의 좋은 것들을 즐거워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고통의 시기에 약간의 위안을 주려는 것도 아니다. 

더 깊은 목적이 있다. 모든 상황의 덧없음을 자각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이 덧없음은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모든 형상이 가진 무상함에 기인한다.

모든 형상이 무상함을 알아차리면 형상에 대한 집착도, 형상과의 동일화도 줄어든다. 

집착하지 않는 것은 이 세상이 제공하는 좋은 것들을 즐기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사실 더 많이 즐길 수 있다. 

모든 것은 무상하고 변화가 불가피함을 알고 받아들인다면, 

즐거운 것을 잃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하거나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즐거움이 이어지는 동안 누릴 수 있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은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 갇히는 대신, 

모든 것을 내려다보는 한 단계 높은 시점을 가질 수 있다. 

광대한 우주 공간에 둘러싸인 지구 행성을 바라보며,

 “지구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하지만 동시에 하나의 행성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역설적인 진리를 깨닫는 우주 비행사와 같은 것이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앎은 무집착과 연결되고, 무집착에 의해 삶에 새로운 차원, 즉 ‘내적 공간’이 열린다. 

집착하지 않고 판단하지 않고 내면의 저항을 멈춤으로써 그 차원에 접근할 수 있다.

 

형상과 더 이상 완전히 동일화되지 않을 때, 진정한 당신인 ‘의식’은 형상의 감옥으로부터 자유로워진다. 

이 자유는 내적 공간의 등장이다. 

설령 좋지 않은 일이 일어나는 것처럼 보일 때조차 

이 공간은 내면 깊은 곳에 있는 하나의 고요, 알아차리기 힘든 평화로 다가온다. 

겉으로 보기에 좋지 않은 상황에 처할 때조차도 그 고요와 평화가 그곳에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 일어나는 사건들 주위에 갑자기 공간이 생겨난다. 

또한 오르내리는 감정 주위에도, 심지어 고통 주위에도 공간이 생긴다. 

무엇보다도 당신의 생각 주변에 공간이 생겨난다. 

그 공간으로부터 ‘이 세상의 것’이 아닌 평화가 발산된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형상이고, 그 평화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신의 평화이다.

이제 당신은 이 세상의 것들에 의미와 중요성을 주지 않고도 그것들을 즐기고 음미할 수 있다. 

그것들은 원래 의미와 중요성을 갖고 있지 않은 것들이었다. 

당신은 창조의 춤에 참여할 수 있으며, 결과에 집착함 없이 행동할 수 있다. 

세상에 대해 “나를 만족시켜 주고, 나를 행복하게 해 주고, 안전하다고 느끼게 해 주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 줘.” 하고 불합리한 요구를 하지 않게 된다. 

세상은 당신에게 그것들을 줄 수도 없으며, 그런 기대를 내려놓으면 자신이 만들어 내는 고통은 막을 내린다. 

그런 모든 고통들은 형상의 과대평가와 내적 공간의 차원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것이다. 

당신 삶에 내적 공간의 차원이 생길 때, 감각의 즐거움 속에 실종되는 일도 집착함도 없이, 

즉 이 세상에 중독되지 않으면서 그것들을 즐길 수 있다.

 

‘이것 또한 지나가리라.’는 말은 실체를 가리키는 표지판이다. 

모든 형상의 무상함을 가리킴으로써 영원을 암시해 보인다. 

당신 내면의 영원성, 그것만이 무상함을 무상함으로 인식할 수 있다.

내적 공간의 차원을 잃어버리거나 잘 알지 못하면 

세상 속의 일들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실제로는 그렇지 않은 심각성과 무게가 얹혀진다. 

형상을 초월한 관점에서 보지 않으면 이 세상은 위협적이고 결국 절망의 장소가 된다. 

“모든 만물이 피곤하다는 것을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다.”라고 말한 구약성서의 예언자도 그렇게 느꼈음에 틀림없다.

 

 


* 출처: 삶으로 다시 떠오르기      Eckhart To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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