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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가? 본문
숙명이나 운명에 대한 믿음은 세상에 널리 퍼져 있으며,
옛날부터 항상 존재해 왔다.
이러한 믿음은 사람들이 삶에서 일어나는 사실을
오랫동안 관찰한 결과 생겨났을 것이다.
사람들은 스스로 통제할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특정한 사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예를 들어 출생과 죽음은 피할 수 없으며,
삶의 많은 사건 역시 피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특정한 결말에 도달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기울이며,
점차 자신의 힘이 아닌 어떤 강력한 다른 힘을 인식한다.
이 힘은 그들의 미약한 노력을 방해하고,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그들의 고군분투를 조롱하는 것처럼 보인다.
많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이해할 수 없는 이 지배적인 힘에
어느 정도 복종하는 법을 배우고,
그 힘이 자신과 주변 세계에 끼치는 영향만을 인식한다.
그렇게 인식한 힘을 신, 섭리, 숙명, 운명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부른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과 달리 사색하는 사람들은
한발 물러서서 개인의 노력과는 관계없이 어떤 사람들은 높이 올려주고,
또 어떤 사람들은 무참히 쓰러뜨리는 이 신비한 힘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차분히 지켜본다.
가장 위대한 시인들, 특히 그중에서도 극작가들은
삶의 이러한 힘을 관찰한 후, 그 내용을 고스란히 작품에 담았다.
그리스와 로마의 극작가들은 대개 자신의 운명을 깨달은 후
그 운명을 피하려고 노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묘사했다.
이때 운명에 맞선 주인공들은 결국
자신이 피하려던 파멸을 스스로 초래하는 결과에 휘말리게 된다.
반면에 셰익스피어의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우리 대부분과 마찬가지로 자기 운명에 대해
미리 알지 못하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극작가들에 따르면, 사람은 자기 운명을 알더라도 그 운명을 피할 수 없으며,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사람의 모든 행동은
정해진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사람들은 각자의 삶 속에서
이 무적의 힘이나 법칙이 작용하고 있음을 경험해 왔다.
오늘날에는 이러한 경험이
‘계획은 사람이 하지만, 그 성패는 신에게 달려 있다.’는 간결한 문장으로 구체화되었다.
모순으로 보일 수도 있지만, 운명에 대한 믿음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를 지닌 행위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믿음도 세상에 널리 퍼져 있다.
모든 도덕적 가르침은 자신의 길을 선택해서 운명을 만들어나가는
인간의 자유에 대해 긍정한다.
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끈기 있게 인내하고 노력하는 모습은
인간 스스로도 ‘내게는 자유와 힘이 있다’고 선언하는 일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운명을 경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자유를 경험하는
이러한 이중적인 경험은 운명론을 믿는 사람들과
자유의지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에 끝없는 논쟁을 불러일으켜 왔다.
이 논쟁은 최근 ‘결정론 대 자유의지’라는 용어로 다시 유행했다.
명백하게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양극단 사이에는
양쪽을 모두 포함하면서도 어느 한쪽의 편을 들지 않고 양쪽을 조화시키는
균형, 정의, 보상의 ‘중도’가 존재한다.
이러한 중도는 양극단 사이의 접점이기도 하다.
진리는 편파적일 수 없으며, 본질적으로 양극단의 조정자 역할을 한다.
따라서 지금 우리가 고려하고 있는 이 문제에 관해서도
운명과 자유의지를 긴밀한 관계로 이어주는 ‘중용’이 존재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인간의 삶에서 운명과 자유의지라는 두 명백한 사실은
실제로 모든 것을 포괄하지만, 이는 하나의 핵심 원리인
‘도덕적 인과법칙’에서 비롯된 두 가지 모습에 불과하다.
도덕적 인과법칙은 운명과 자유의지,
개인의 숙명과 개인의 책임을 모두 필요로 한다.
또 원인의 법칙은 결과의 법칙이기도 한데,
원인과 결과는 항상 대등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련의 인과관계는 물질세계와 정신세계 모두에서
영구적인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 결과 이 세계에서 인과관계는 영원히 공정하고 영원히 완벽하다.
따라서 모든 결과는 미리 결정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미리 결정된 것은 단지 ‘원인’일 뿐이다.
지혜로운 사람은 자신의 삶이 일련의 인과관계에 따라 펼쳐지고 있음을 발견한다.
삶은 원인과 결과로 이루어져 있다.
이는 씨앗을 뿌리는 일인 동시에 그 열매를 거두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원인이며,
행동이라는 그 원인은 결과와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
우리는 원인(자유의지)을 선택한다.
그러나 결과(운명)를 선택하거나 바꾸거나 피할 수는 없다.
따라서 자유의지는 원인을 발생시키는 힘을 나타내며,
운명은 원인에 따른 결과에 관여하는 힘을 말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특정한 결말을 갖도록 예정되어 있음은 사실이지만,
그렇게 되도록 명령을 내리는 주체는 자기 자신이다.
또한 자신이 선택한 행위(원인)에 따라 무한에 가까운 결과들 중
특정한 결과(피할 수 없는 긍정적 혹은 부정적 결과)를 맞이한다는 것 역시 사실이다.
여기서 사람에게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이 없다는 주장이 나올 수도 있다.
이 주장을 분석하면 이러하다.
한 사람의 어떤 행위는 그 사람의 인격이 만들어낸 결과이다.
그 인격이 좋든 나쁘든
태어날 때부터 ‘부여받았기’ 때문에 인격에는 책임이 없다.
따라서 그 인격을 지니고 있는 그 사람과
그가 한 행동에도 책임이 없다는 논리다.
만일 인격이 정말 ‘부여받은 것’이라면, 이 주장은 사실이다.
그렇다면 도덕적 법칙은 존재할 이유 자체가 없어지며, 도덕적 가르침도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인격은 이미 완성된 상태로 부여받는다기보다는 발전하며 만들어진다.
실제로 인격이란 도덕적 법칙 자체의 결과이자 산물, 즉 행위의 산물이다.
인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행위가 결합하여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사람은 자기 행위의 주체이며, 자신의 인격을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그런데 행위의 주체이자 인격을 만드는 존재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형성하는 존재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자신의 행위를 수정하고 조정할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원인이 되는 행위를 바꿀 수 있다는 사실은
행위의 결과물인 인격도 마찬가지로 변화시킬 수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미 결정되어 있는 수많은 결과(운명)들 중에
그 원인(행위)에 해당하는 결과(운명)도 결정할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사람들은 자신의 인격을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바꿈으로써
스스로 새로운 운명을 미리 결정하고 있다.
즉, 행위의 성격에 따라 비참한 운명이 될 수도 있고, 행복한 운명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 인격은 운명 그 자체이다.
인격은 수많은 행위들이 결합해서 만들어지며,
그 안에 그 행위들로 인한 결과들이 이미 다 담겨 있다.
이 결과들은 인격의 어둡고 깊은 곳에 씨앗처럼 심어져 있으면서
발아하고 성장해서 열매 맺을 적절한 시기를 기다린다.
어떤 사람에게 생기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을 반영한 결과이다.
그를 따라다니는 운명은 노력으로 피할 수 없다.
운명은 그저 그 사람의 그릇된 행동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강요하는 무자비한 힘일 뿐이다.
초청하지 않았는데도 찾아오는 축복과 저주는
자신이 내보낸 소리가 되돌아와 울려 퍼지는 메아리와 같다.
만약 당신이 ‘당신의 행위와 인격’을 통해 운명을 극복하고자 한다면
‘인과법칙’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살펴보라.
무엇을 살펴봐야 할지 막막한가?
그렇다면 우선 현재 당신의 삶을 살펴봐야 한다.
현재는 모든 과거의 총합이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 지금까지 생각하고 행동한 모든 것의 최종 결과는 현재의 삶에 담겨 있다.
물론 선한 사람이 실패하고 악한 사람이 성공하는 모습이 유독 눈에 들어올 때가 있다.
이런 사례는 긍정적인 행위가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모든 도덕적인 격언과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 같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은 인생에 정의로운 법칙이 작용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고,
심지어 성공한 사람은 대개 정의롭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해 버리기도 한다.
그러나 도덕적 법칙은 실제로 존재하며,
이런 피상적인 결론으로 변경되거나 파괴되지 않는다.
사람은 변화하고 발전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하라.
고로 선한 사람이 항상 선했던 것은 아니며, 악한 사람도 언제나 악하지는 않았다.
현생만 살펴보더라도 이를 알 수 있다.
지금 정의로운 사람이 과거에는 의롭지 못했고,
지금 친절한 사람이 과거에는 잔인했으며,
지금 순수한 사람이 과거에는 불순했던 사례를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반대로 지금 의롭지 못한 사람이 과거에는 정의로웠고,
지금 잔인한 사람이 과거에는 친절했으며,
지금 불순한 사람이 과거에는 순수했던 사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이 현재 불행을 겪고 있다면,
그는 과거에 악의 씨앗을 뿌린 결과를 거둬들이는 중이다.
나중에는 현재 선의 씨앗을 뿌린 결과를 기쁨으로 거둬들일 것이다.
마찬가지로 악한 사람이 현재 성공하고 있다면
과거에 선의 씨앗을 뿌린 결과를 지금 거둬들이는 중이다.
나중에는 현재 악의 씨앗을 뿌린 결과를 거둬들일 것이다.
인격은 정신적인 습관이 굳어진 것이며 모든 행동들의 결과이다.
수없이 반복된 행동은 무의식에 각인되어 자동적인 행위가 된다.
그때는 행위자의 노력이 없어도 그 행동이 저절로 반복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 것이 불가능하게 느껴지는 때가 왔다면,
그 행동은 행위자의 정신적 특성으로 완전히 굳어진 셈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천성’이란 한 사람이 발전하는 과정에서
자기의 생각과 행위로 쌓아 올린 습관의 결합체이다.
그러므로 ‘타고난 천성’의 정확한 표현은
‘태어난 이후 수많은 과정을 거치며 발전해 온 천성’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한 일을 얼마나 지속적으로 반복했느냐에 따라
그 인격은 장차 선하거나 악하게 변화해 갈 것이다.
원인이 없는 결과는 없다.
그림자가 있는 곳에는 그림자의 본체가 있기 마련이다.
당신의 삶에 찾아오는 결과는 당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산물이다.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일하면 일이 확장되고 번영을 누리게 된다.
그러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불만을 품으며 일하면 능률이 줄어들고 쇠락하게 된다.
마찬가지로 삶의 모든 다양한 상황도 행위의 결과이며,
당신의 생각과 행위로써 만들어낸 운명이다.
사람들의 인격이 수없이 다양한 이유는 각자 다양한 행위의 씨앗을 뿌리고,
다양한 성장 과정을 거쳐 무르익기 때문이다.
이러한 씨 뿌리기 과정은 눈에 보이는 현재에만 국한되지 않고 미래로도 무한히 확장된다.
각자 뿌린 대로 끊임없이 자신의 행위가 만들어낸
달콤한 열매와 쓴 열매를 거두게 될 것이다.
위대한 ‘절대 인과법칙’은 지금도 모든 이들에게
개개인 각자 손수 직조한 ‘일시적인 운명’을 그 어떤 착오도 없이 냉정하게 할당하고 있다.
이 운명은 어떤 이들을 눈물짓게 만들고, 또 어떤 이들은 미소 짓게 만든다.
인생은 인격을 만들어내기에 최고의 학교이다.
모든 사람은 분투와 투쟁, 악덕과 미덕, 성공과 실패를 통해
느리지만 확실하게 지혜의 교훈을 배우고 있다.
- 출처: 생각의 연금술
제임스 알렌 지음 / 하와이 대저택 엮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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